제가 몇일 전에 어떤 예술가하고, 식사를 할 자리가 있었습니다. 그 분이 지금 60이 넘으셨는데, 요즘 배우는 재미에 빠졌다. 배우는 재미에 빠졌다. 라고 할 때, 제가 또 해서는 안될 이야기를 하고 말았습니다.
“선생님은 앞으로도 창의적으로 되기 어렵겠습니다.” 지금 이 나이에 배우는 재미가 그렇게 좋다니! 그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이제 그만 배우세요. 지금은 자기를 표현하세요.”
배우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습관이 되면 자기 표현에 장애를 갖게 된다.
우리가 배우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배우는 것이 습관이 되면 자기 표현에 장애를 갖게 됩니다. 우리가 배우는 대상은 다른 사람의 표현을 습득하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다른 사람이 표현해 낸것만 습득하면서 내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느냐? 어느 순간에는 배우는 것으로 만족하면 안 된다.
배우는 것은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존재해야 된다. 우리가 배우고 습득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것이 자기한테 표현의 동력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배움은 한쪽에 서는 것이죠? 자기가 경계를 모두 품은 것이 아닌것이죠?
배울 때는 표현의 동력이 필요하고
읽을 때는 쓰는 동력이 필요하고
들을 때는 말하는 동력이 필요하다.
배울때는 표현의 동력이 있어야되고, 읽을 때는 쓰는 동력이 있어야 되고, 들을 때는 말하는 동력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의 활동은 어디에서 이루어지느냐? 읽기와 말하기 사이에 있어야 되고, 배우기와 표현하기 사이에 있어야 되고, 듣기와 말하기 사이에 있어야 합니다.
삶 전체를 배우는데 바치고, 정리하는데 바치고, 듣는데 바친다면 자기는 어디에 있는가?
이 사이에 있을 때 인간은 순수해지지 않고, 젊잔하지 않고, 거칠어집니다. 눈빛이 야성이 됩니다. 짐승의 눈빛을 회복합니다. 배우는데 자기의 삶 전체를 바치고, 자기의 삶 전체를 누가 말하는 걸 정리하는데 바치고, 자기 삶 전체를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듣는데 바친다면 도대체 자기는 어디에 있는것입니까?
자기는 이제 어디에 있어야 됩니까? 경계에 있어야 됩니다. 다른 사람이 말할 때, 그 말을 듣는 순간 자기 안에는 경계성을 회복하는 야성이 죽지 않고 있어야 됩니다. 다른 사람의 글을 읽을 때는 내가 어떻게 쓸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읽어야 합니다. 경계에 서 있다는 것은 자기가 어느 한쪽에 수동적으로 갇힌게 아니라 항상 자기가 경계에 서서 자기로 살아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런 사람을 “살아 있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이성에 제어되지 않고, 욕망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고, 이념의 수행자가 아니라 욕망의 실행자가 된다는 것이고, 다른 사람의 말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말을 표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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